역사관련 잡소리. 일상의 이야기들

조선이 사농공상을 내세우고(사실은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동네 말고는 전부 천함) 문귀무천(文貴武賤. 제가 만든 조어입니다)의 세상에 여자대접이 심각하게 후달렸던 나라라는 사실 자체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여년이나 버틴 건 꽤나 무서운 일입니다. 동쪽에 조선이 있다면 서쪽에는로마가 있다... 정도가 될까요?

오랫동안 조선의 국왕들은 틈틈이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애를 쓰곤 했는데, 이렇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었던 것도 태조 이성계가 권력이 통제가 안되고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개판이 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태조와 최영 장군이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것이 고려의 망국의 신호탄이라면, 이는 왕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기보다는 조정 신료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탓에 고려가 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걸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는 태조부터 태종이 벌인 일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짐승은 바로 머리털 시커먼 짐승'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수준입니다. 태조는 왕씨를 싹 쓸어버려서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는데 얼마나 무자비한 숙청인지는 두말이 필요없죠. 훗날 벌어진 비극이 바로 이런 행동에 분노한 고려 태조 왕건의 복수라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태종이야 뭐 말이 필요없습니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아빠 친구를 죽이고 계모지만 어머니한테 깽판을 치더니 급기야는 동생을 죽이고 형도 죽게 만들어서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제대로 박아넣고선 심복과 처갓집과 사돈집을 풍비박살낸 사람이 누구? 바로 정안군 태종 이방원! 신하들을 제어 못하는 왕과 외척의 전횡으로 망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의 초기에 피바다를 만든 사람 누구? 정안군 태종 이방원!
여기에 비하면 차라리 조카를 몰아내고 선왕의 측근들을 숙청한 세조의 즉위과정은 매우 온건하게 보일 판입니다. (더 무서운 건 이런 일들이 그 시절 사방에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거...) 그 뒤에 정안도 수양도 아니면서 정안과 수양을 꿈꿨다가 다 말아먹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겨나간 뱁새, 광해나 아들을 쌀통에 처넣고 공개처형해버린 영조에 "지금 너님 나한테 딴지거시는 거임? 이 틀딱이 뭔 개소리야."한 정조도 있지만 이건 훗날의 이야기니까 패스.

일단 이 사람한테 '왕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1리라도 있다'고 인식되면 그냥 망하는 겁니다. 닥치고 버로우하지 않는 이상 말이에요. 누구보다 풍부한 경험과 실적과 전적을 겸비한 (...) 태종이니 신하들의 의견을 "경들도 삼봉처럼 되고 싶다면 계속 해보시오. 과인은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형제들을 죽음으로 몰아놓고 내 사람들도 다 쳐내고 처남들도 죽이고 마누라도 개털로 만들고 아들들도 쫓아내고 사돈한테는 사약을 보낼 사람이외다. 어디한번 해보시구려."하면서 씹어버렸죠. 이도의 즉위 때 조금이라도 태클을 걸 성 싶으면 그냥 다 쓸어버렸던 겁니다. 세종대왕께서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신 게 정말 다행이에요...

태종이 진짜로 "피는 내가 흘릴테니 너는 훌륭한 임금이 되어라"는 말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태종이 그렇게 왕권을 튼튼하게 만든 덕분에 세종의 정책이 아주 무난하게 시행됐다는 건 부정할 수 없죠. 장영실의 중용도 그렇거니와, 훈민정음 창제 당시 세종께서 "주상깨서는 이딴 헛짓으로 대국을 거스르고 에너지 낭비하지 마소서"하는 상소를 받고 빡쳐서 상소 보낸 사람들 불러놓고 그 면전에서 "이 낫 놓고 X도 모르는 주제에 백성을 짐승으로 여기는 무식하고 쓸모없는 먹물 주제에 지랄하고 자빠졌네. 니들이 지금 죽은지 오래인 설총은 떠받들고 니들 앞에 눈뜨고 있는 임금은 개무시한다 이거냐? 이거 지금 나랑 현피뜨자는 거 맞지? 너 감빵." ...하셨던 일화도 다 태종이 부모형제처가사돈다른아들놈들 다 개털로 만든 덕분에(...) 나왔지요. 아니었다면 시작도 못했을 겁니다.

고려 후기의 황금수저 투기꾼과 땡중들의 해악도 심히 극심했는데 이들은 진짜 거저 얻은 권력과 지위로 남들 등쳐먹으면서 대대손손 놀고먹는 악당들이었으니까요. 그야말로 그 시절 특권층이 흔히 하든 그 짓을 하고 있어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참 귀족들이라는 놈들 하는 짓은 동서고금 다른 게 없다는 생각밖에 안든다니까요. 이들의 횡포가 고려를 망조로 이끌었으니만큼 조선의 핵심을 이룬 유학자들이 이들에 대해 품은 반감이야 대단했겠죠. 지금으로 보면 이 황금수저 투기꾼들은 천민 자본주의의 진수를 보여주니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 자체에 대한 광적인 증오로 뭉친 사회주의 사상과 뭔가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경제정책은 그 시절의 보편적인(?) 바탕에 사회주의스러운 이데올로기가 깔려있는 것도 싶은데...

사찰이 그냥 사채업자들의 소굴이 된 거야 말이 필요 없을 듯. 지금은 먹사와 미니 예루살렘 성전이 난무하지만 그 시절엔 땡중과 사찰이었으니 말입니다. 요즘 사회에서 나쁜 짓 하던 놈들이 교회로 내빼기도 하지만(서쓰레기가 먹사가 되는 등) 그때는 사찰로 튀어서 머리깎고 스님 행세하면 아무도 손을 못댔죠. 그린 자들의 해악을 보고듣고 체험한 유학자들은 "땡중하고 가짜 사찰을 없애려면 불교극 조져서 진짜 도닦을 사람들만 남겨놔야한다!"했지 않았을 까요? 저 유명한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에서 불교를 기독교로 바꾸면 지금의 짜가톨릭을 까는 논리와 거의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건국세력은 불교와 상인(장사'치'라는 말부터가...)들에 대해서 절대적인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을 철저하게 사회에서 왕따시키는데 아무런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장사를 정당한 노동으로 볼 생각 자체가 없었던 거죠. 그들 시대의 상인은 진짜 그랬으니까...

더욱이 전신인 고려는 화려한 기풍을 품고 있었으니 이 고려를 부정한 조선이 국가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데 말고는 화려한 풍조를 좋지 않게 여긴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고려가 왜 망했나? 다들 사치스러워서! 신라는 왜 망했나? 다들 사치스러워서!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없으면 꾸미지 마라!"...라는 느낌?

또 한가지, 흔히 고려 시대가 조선 시대보다 여성들이 더 정당한 대접을 받았으니 고려 시대가 조선 시대보다 더 낫지 않느냐는 말도 있는데, 그게 맞는 것 같긴 합니다. 왕의 행차에서 "첩을 두자고 한 게 저 놈이다" 고 손가락질을 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고려 사회는 조선 사회보다 더 심한 귀족 사회였다는 거죠. 조선 시대는 금수저도 순식간에 흙수저로 바뀔 위험성이 상존했으나 고려 사회에서는 반역을 저지르거나 최고 권력자 눈 밖에 나지 않는 이상 한번 금수저는 영원한 금수저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게 무슨 결과를 낳는가 하면, 조선의 특권층보다 고려의 특권층 범위가 더욱 컸다는 말이 됩니다. 부모빨과 처가빨로 대대손손 금수저가 보장되는 사회가 고려 사회였단 말이죠. 이 시대는 음서로 벼슬하고 집안 덕으로 출세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시대기도 합니다. 조선에서 그랬다가는 당장 뒷담화 대상은 물론이요, 틈만 나면 "아무개의 아들 거시기는 금수저인 주제에 지 분수도 모르고 까부니 짤라버리소서" "그로자" "너 해고" (...) 하는 3단 콤보 쳐맞고 한창 끗발이 날려도 그냥 즉사판정 뜨기 딱 좋았습니다. 진짜 재수없으면 오히려 끗발이 날렸다는 이유로 더욱 철저하게 박살날 가능성까지 있었죠. 뭐 그래도 빠져나가는 놈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고려 시대는 빠져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걸릴 가능성이 없었으니...

여기에 유학자들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던 때 하필 가장 깽판을 쳤던 게 기씨 일가기도 했고 말이죠. 물론 기황후가 자기를 팔아버린 고려에 무슨 정이 있었겠습니까만... 기황후를 등에 업은 기씨 일가의 횡포는 너무나도 유명했고, 공민왕이 가장 먼저 조져버린 것도 기씨 일가였는데, 그렇게 잘 나가다가 그만 노국공주와 사별한 뒤에 완폐아가 돼서는 안그래도 꼴보기 싫었던 '중놈'이 나라 정책을 좌지우지하다가 망해버렸는데 공민왕의 정치적 파트너가 바로 신진사대부와 이자춘/이성계 부자.(...) 이러니 조선 건국 세력이 여성과 승려에 질색팔색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 세력은 성리학 사상에 입각하여 "여자가 남자를 돕지 않고 제 멋대로 날뛰는데 이건 여자 역할이 아니잖아? 여자는 여자가 제 역할을 못하면 남자도 제 역할을 못하니 당연히 망할 수 밖에. 여자는 남자를 돕고 남자는 여자들이 헛수고하지 않게 행동해야 세상이 잘 돌아갈거야" 라는 사상을 토대로 사회 문제를 들이대고 말았습닏. 즉 "여자는 여자 역에 충실하고 남자는 남자 역에 충실해야지. 근데 여자가 설치니까 남자들이 제 역할을 못하잖아? 이게 다 여자 탓이다!" 가 된거죠.
물론 그 반대의 사례에 대해서는 "그딴 일이 있을 리가 없다! 남자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제 역할을 하고 있단 말이야!"라며 안들려 안보여 생각안함을 시전했지만 말입니다. (마누라들이 안챙겨주면 꼼짝없이 얼어서 굶어죽을 주제에 허세나 탕탕 부리는 게 남자의 역할이라면 전 그런 남자 안할래요. 하지만 '자칭 선비'들은 그것도 남자의 역할이라고 하죠. 아무리 봐도 마누라한테 얹혀사는 게 군자의 역할은 아닌 것 같은데...)

권위와 하극상에 대해서 필요이상으로 엄격한 것도 고려 말기의 개판이 된 나라 꼴을 보고 자라고 물려받은 영향이 커보입니다. '저 꼴 안나려면 위계질서는 확실히' 라는 사고방식이 자리잡은 거죠.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무신들과 하층민이 있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힘깨나 쓰는 무인들이 딴살림을 차리거나 그 비슷하게 나오면서 나라가 어지러워졌으니 문신들이 무신들을 견제할 수 밖에요. 물론 대놓고 하면 또 그 일이 일어날테니 적당히 달래주면서. 하지만 뭐든지 너무 오래되면 취지는 없어지고 안좋은 것만 남는 법. 결국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하게 여기는 풍조가 정착되면서 입만 살아 나대는 키...아니, 아가리 파이터들만 양산되고 맙니다. 물론 왜놈이나 되놈들은 말보다 칼부터 휘두르고 총부터 갈기고 말았으니 상대가 되나요.

사치스러운 풍조 역시도 망조임에는 분명했고 고려 말기에는 그 경향이 극에 치달았으니, 조선의 건국세력이 이를 병폐로 여긴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력의 전횡을 경계하는 풍조가 "힘으로 해결하는 건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지"로, "물건만들고 사고 파는 것들은 원래 천한 것들인데다가 툭하면 반란일으키는 놈들이니 사람 대접할 필요가 없다."고 굳어졌으며 사치를 경계하는 풍조가 그냥 "풍족한 것보단 가난한 게 낫다"는 이상한 개똥철학에 "그래도 필요할 때는 권위는 세워야지" 가 "우린 무조건 잘났음"하는 개똥철학으로 변질되고 "남의 밥 빌어먹느니 굶어죽는 것이 명예로운 죽음이다"라는 별 해괴한 정신병자스러운 사고방식으로 변질됐다는 겁니다만.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고, 결국 조선 말기 역시 고려와 똑같은 상황이 닥쳐오고야 말았죠. 하지만 조선 말기 국제 정세는 더욱 위험했으나 정치세력들은 더 멍청하거나 더 거만하거나 더 나약하거나 더 성급했거나 더 비열했으며, 거의 하나같이 개똥철학과 사춘기에 머물러 있는 정신상태를 품고 있었으며 극도의 국뽕이거나 극도의 국까거나 쿨게이였지요. 물론 적군을 앞에 두고 내탓은 없고 니탓만 있다고 싸우다가 줄 잘 선 놈이 금수저를 득템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으니 오호 통재라.



덧글

  • 도연초 2018/07/09 09:17 #

    그걸 충실히 계승하는 나라가 바로 북한...
  • 무명병사 2018/07/11 08:16 #

    소련도 못한 일을 해낸 게 어찌보면 대단합니다.
  • 존다리안 2018/07/09 13:01 #

    중국도 유교 본산이었지만 조선 식으로 나가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놈의 양반들도 중놈들 탐욕 탓하는데 걔네도 서원 가지고 똑같은 짓을 했다든가...
  • 무명병사 2018/07/11 08:15 #

    그래서 대원이 대감이 "도둑놈 소굴이 된 지 오래인데 그걸 놔두라고?" 하면서 싹 걷어버렸죠. 사실 타락한 사원보다 더 했습니다. 서원에서 원님을 곤장친 사례도 있다고 하니까요.
  • 자유로운 2018/07/09 13:27 #

    여성 대접이 나빠진건 아무래도 그놈의 임란이 크지요. 그 전까지랑 그 후가 확 달라졌으니까요.

    그래도 당대로만 따지면 조선은 시스템 측면에선 상당히 뛰어난 면도 많았어요.
  • 무명병사 2018/07/11 08:13 #

    2000년대 이후로 사방팔방에서 조선을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지만 모든 면에서 보면(여성의 위치는 빼고) 여러모로 고려보다 더 합리적인 나라였지요.
    하지만 조선 말기가 하필이면 격동의 20세기 초반...
  • KittyHawk 2018/07/09 16:21 #

    조선 유학자와 일본 유학자의 대담 일화를 보면 조선은 왜 그랬는지 이해는 되지만서도 단단히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느낌이 오기도 하죠...
  • 무명병사 2018/07/11 08:12 #

    기존 사회 구조를 고치거나 더욱 강조하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조선이 고른 건 바뀌자가 아니라 더 강화하자는 쪽이었지요.
    그리고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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